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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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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은 1346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347년 할머니로부터 부르고뉴 백작령과 아르투아 백작령을 상속받았고, 1349년에는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1355년 플랑드르 여백작 마가레타 3세와 결혼하여 플랑드르, 느베르, 레텔, 안트베르펜 백작령과 브라반트, 림부르크 공국 상속을 약속받았다. 1360년에는 어머니로부터 오베르뉴 백작령과 불로뉴 백작령을 상속받았으나, 1361년 승마 사고 또는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프랑스 왕 장 2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왕실에 귀속시킨 후 막내아들 필리프 2세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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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기본 정보
이름필리프 1세
작위부르고뉴 공작
기타 작위오베르뉴 백작
불로뉴 백작
부르고뉴 백작
아르투아 백작
출생1346년
출생지루브르-앙-플렌 성
사망1361년 11월 21일
사망지루브르-앙-플렌 성
배우자마르그리트 드 당피에르
아버지필리프 드 부르고뉴
어머니잔 1세
가문부르고뉴 가문
통치
부르고뉴 공작 즉위1349년
부르고뉴 공작 퇴위1361년 11월 21일
부르고뉴 공작 계승자필리프 2세
오베르뉴 백작 및 불로뉴 백작 즉위1360년
오베르뉴 백작 및 불로뉴 백작 퇴위1361년 11월 21일
오베르뉴 백작 및 불로뉴 백작 계승자장 1세
부르고뉴 백작 및 아르투아 백작 즉위1347년
부르고뉴 백작 및 아르투아 백작 퇴위1361년 11월 21일
부르고뉴 백작 및 아르투아 백작 계승자마르그리트 1세

2. 생애

필리프 1세는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의 아들 필리프와 잔 1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필리프는 오도 4세와 잔 3세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였다.

필리프는 1347년 한 살 때 할머니로부터 부르고뉴 백작령(프랑슈콩테)과 아르투아 백작령을, 1349년에는 세 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았다. 1360년에는 어머니로부터 오베르뉴와 불로뉴 백작령을 상속받았다.[1]

1355년, 필리프는 마가레타와 결혼했다.[1] 이 결혼으로 1357년에 플랑드르, 느베르, 르텔, 안트베르펜 백작령과 브라반트 공국, 림부르크 공작령 상속을 약속받았다. 이 땅의 대부분은 저지대 국가에 위치해 있었다.

어머니 잔 1세는 프랑스장 2세와 재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고, 1360년 9월 사망할 때까지 필리프의 후견인으로 부르고뉴를 다스렸다.[2] 같은 해 10월 20일 필리프는 성년이 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상속

필리프 1세는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의 아들인 필리프와 잔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2] 아버지 필리프는 오도 4세의 아들이었지만 필리프 1세가 태어나기 전후로 요절하여, 할아버지 오도 4세가 죽은 후 어린 나이에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1347년, 필리프는 한 살 때 할머니 잔 3세로부터 부르고뉴 백작 영지(프랑슈콩테)와 아르투아를 상속받았다.[1] 1349년에는 할아버지 오도 4세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았다.[1] 1360년에는 어머니 잔 1세로부터 오베르뉴와 불로뉴 백작령을 상속받았다.[1]

어머니 잔 1세는 프랑스장 2세와 재혼하여 프랑스의 여왕이 되었고, 1360년 9월 사망할 때까지 필리프의 후견인으로 부르고뉴를 다스렸다.[2] 필리프는 같은 해 10월 20일에 성년이 되었다.

2. 2. 결혼과 저지대 국가 영토 확보

1355년 필리프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Louis de Mále)의 딸인 담피에르 가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1] 1357년에 이 결혼으로 플랑드르, 느베르, 르텔, 안트베르펜 백작령과 브라반트 공국, 림부르크 공작령 상속을 약속 받았다. 이 땅의 대부분은 저지대 국가에 위치해 있었다.

2. 3. 성년 선언과 어머니의 섭정

1347년 필리프는 불과 한 살 때 할머니로부터 부르고뉴 백작령과 아르투아 백작령을 계승했다.[1] 1349년에는 세 살의 나이로 할아버지 오도 4세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1360년에는 어머니 잔 1세로부터 오베르뉴 백작령과 불로뉴 백작령을 상속받았다.[1]

1355년 필리프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Louis de Mále)의 딸이자 담피에르 가문 출신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1] 이 결혼을 통해 1357년 플랑드르, 느베르, 레텔, 앤트워프 백작령과 브라반트, 림부르크 공작령의 상속을 약속받았다.[1] 이 영토의 대부분은 저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어머니 잔 1세는 프랑스장 2세와 재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고, 1360년 9월 사망할 때까지 필리프의 후견인으로서 부르고뉴를 다스렸다.[2] 필리프는 같은 해 10월 20일에 성년으로 선언되었다.[2]

3. 사망과 상속

필리프 1세는 1361년에 페스트 또는 승마 사고로 사망했다.[3] 그의 죽음으로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 문제가 복잡하게 얽혔다. 상속 문제는 어머니 잔 1세의 재혼 상대이자 필리프 1세의 외삼촌 중 한 명인 장 1세가 담당했다. 그는 12월 28일에 부르고뉴 공국의 조정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고, "공령은 공령으로서 존속"한다는 취지로 합의했다.

3. 1. 갑작스러운 죽음

1361년 필리프는 페스트[3] 또는 낙마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는데,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을 마무리 짓기 전이었다.[3] 그의 죽음으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부르고뉴 공작위를 프랑스 왕국에 귀속시키려 했다.[3] 장 2세는 1363년 6월 27일까지 막내 아들 용담공 필리프를 왕실 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64년 6월까지 부르고뉴 공작으로 만들었다.[4][5]

3. 2. 복잡한 상속 과정

1361년, 필리프 1세는 승마 사고 또는 페스트로 인해 1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상속 문제가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 부르고뉴 공국: 필리프 1세의 증조부인 로베르 2세의 손자이자 계부인 장 2세가 상속받았다.[3] 실질적으로는 그의 아들 샤를 5세가 획득했다. 1363년, 장 2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왕실에 귀속시킨 후[3] 그의 막내아들 필리프 2세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하여[4] 공작령을 왕자령으로 주었다.[5]
  • 부르고뉴 백작령과 아르투아: 필리프 1세의 고모할머니이자 약혼녀의 조모인 마르그리트 1세가 상속받았다.
  • 오베르뉴 백작령과 불로뉴 백작령: 필리프 1세의 어머니 잔 1세의 외삼촌이자, 어머니의 재혼 상대인 장 2세의 친척인 장 1세가 상속받았다.


이 외에도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가 장자 상속권을 주장하며 부르고뉴 공작위를 요구했으나, 주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패배하여 포기했다.

1362년 1월 16일, 시토에서 프랑스 왕 장 2세, 부르고뉴 여백작 마르그리트 1세, 장 1세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는 비공식적이었으나, 같은 날짜의 증서가 교환되었다.

1363년 1월 15일,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와 프랑슈콩테를 샤를 5세의 동생 필리프 2세에게 수여하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같은 해 9월 6일, 부르고뉴 공작위는 필리프 2세에게 주어지면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성립되었다.

3. 3. 프랑스 왕실의 개입과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탄생

필리프 1세는 1361년에 승마 사고로 사망했다.[3] 필리프 1세가 사망하자 상속 문제가 발생했는데, 어머니 잔 1세의 재혼 상대이자 필리프 1세의 외삼촌 중 한 명인 장 1세가 이 문제를 담당했다.[4] 그는 12월 28일에 부르고뉴 공국의 조정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고, "공령은 공령으로서 존속"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4]

다음 해인 1362년 1월 16일, 장 2세, 부르고뉴 여백작 마르그리트 1세, 장 1세는 시토에서 만나 합의를 보았다.[4] 이 합의 내용은 공식 문서는 아니었지만, 같은 날짜에 증서를 교환하여 효력을 갖게 되었다.[4]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는 장자 상속을 주장하며 부르고뉴 공작위를 요구했다.[4] 그러나 주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1363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군대에 패배하여 요구를 포기했다.[4]

1363년 1월 15일,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는 프랑슈콩테를 샤를 5세의 동생 필리프 2세에게 주기로 하는 밀약을 맺었다.[4] 같은 해 9월 6일, 장 2세필리프 2세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했고, 이로써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시작되었다.[4]

3. 4. 나바라 왕의 상속권 주장

필리프 1세가 사망한 후,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는 로베르 2세의 장녀 마르그리트의 손자로서 장자 상속권을 주장하며 부르고뉴 공작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은 주변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고,[1] 1363년에 샤를 5세가 보낸 용병대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군대에 패하여 요구를 포기했다.

4. 가계

필리프 1세
아버지필리프
할아버지증조부로베르 2세
증조할머니프랑스 공주 아녜스[1]
할머니증조부필리프 5세
증조할머니잔 2세
어머니잔 1세
할아버지증조부로베르 7세
증조할머니블랑슈 드 부르봉[2]
할머니증조부에브뢰 백작 루이[3]
증조할머니마르그리트 다르투아


참조

[1] 서적 The Promised Lands: The Low Countries Under Burgundian Rule, 1369-1530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9
[2] 서적 The Hundred Years War:Trial by Fir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9
[3] 서적 Edward III Yale University Press 2011
[4] 서적 Philip the Bold: The Formation of the Burgundian State The Boydell Press 2005
[5] 서적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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